'지정학의 포로'가 된 우크라이나 "아! 키이우여!"
지정학적 요충지 우크라이나가 겪어온 침략의 역사. 몽골 침입부터 나치 점령, 소련 지배, 그리고 현재 러시아 전면침공까지 '전략적 회랑'의 숙명적 비극을 되짚어본다.

나치 독일이 우크라이나에 내린 잔혹한 지침
"이 지역에 살던 수백만 명은 불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들은 죽어 없어지거나 아니면 시베리아로 떠나야 한다. 흑토지대의 농산물을 획득함으로써 벌어질 현지인들의 아사를 막을 유일한 방안은 유럽으로의 식량 공급을 중단하는 길뿐이다."
이는 1941년 5월 23일 나치 독일이 우크라이나 점령 당국에 보낸 지침 중 일부다. 히틀러 정권이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서다.
우크라이나 겨울 풍경과 국민음식 보르쉬
우크라이나의 겨울은 유난히 을씨년스럽다. 겨울이면 오후 3시부터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다, 비가 오는 날도 많다.
이곳저곳 둘러보며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여행객들이라면 시간 계산을 잘해야 한다. 어둠이 순식간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북풍한설' 같은 매서운 바람은 없지만 냉기와 습기가 한꺼번에 스며들어 사람의 몸을 으슬으슬하게 만든다.
따뜻한 겨울인 줄 착각하고 옷을 얇게 입고 나간 이방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는 이른바 힐링푸드인 스프 '보르쉬'가 위안이 된다. 각종 야채가 들어있는 이 뜨끈한 국물이 몸 안에 들어가면 피폐해진 육신에 활기가 돈다. 뭔가 새콤한 맛의 동양적 미감이 가미된 듯하여 마치 어릴 적 언제쯤 먹어보지 않았을까 착각이 들 정도다.
2007년 겨울, 우크라이나 흑토와의 첫 만남
2007년 겨울의 어느 날, 나는 시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벗어나 소련 시절 핵미사일기지가 있는 삐에르보마이스크로 향하던 길에서 보르쉬를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 감기 기운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식당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길가를 헤매다 식당이 어디인지 물어보러 들어간 작은 가게가 마침 음식점이었는데, 그곳에서 보르쉬를 만나게 됐다. 푸근한 인상의 식당 주인이 내 얼굴을 힐끗 보더니 추천한 메뉴였다. '아니 이렇게 토마토케첩을 많이 뿌린 듯한 스프가 다 있나?' 생각하기 무섭게 좋은 향이 코끝에 닿았다.
이 오래된 친구 같은 우크라이나의 국민음식이 몸 안에 들어가자 정말이지 세상이 달라 보였다. 그동안 먹는 것을 얕보고 가볍게 여겼던 나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욕망했던 우크라이나 흑토
그렇게 달라진, 아니 조금은 총명해진 눈으로 밖으로 나와 세상을 둘러보았다. 그제서야 발밑의 검은 흙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를 낮춰 손으로 흙을 만져보았다. 단단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약간은 푸석하면서도 뭔가에 버무려진 듯한 느낌의 토양이었다.
'이것이 히틀러와 스탈린이 그토록 욕망했던 우크라이나의 흑토란 말인가'
이 비옥하고 기름진 땅에서 대기근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스탈린의 식량 수탈과 우크라이나 대기근
1933년 스탈린은 소련의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의 식량을 수탈해 유럽에 수출했다. 그 결과 먹을 것이 부족해진 우크라이나에선 너나 할 것 없이 식량배급소에서 빵 한 덩어리를 받기 위해 하루 종일 줄을 서야 했다.
독재자 스탈린에게 우크라이나는 '쥐어짜야 할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1941년 또 다른 독재자 히틀러가 이 땅을 점령했을 때도 다를 바 없었다. 미국 예일대의 역사학자 티모시 스나이더 교수의 책 <피에 젖은 땅(Blood Land)>을 보면 우크라이나인들이 겪었던 당시의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소련 붕괴 후 크림반도 귀속과 동부지역 개발
이때 우크라이나인들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2차 대전 이후에도 상당 기간 이 지역의 소련 정권에 대한 불신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못했다. 그 결과 스탈린 사후 서기장을 계승한 후루시초프는 우크라이나의 민심을 다독이려는 정치적 계산하에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귀속시키고 동부지역의 주요 공업지대 건설을 지원하게 된다.
이때 크림반도에는 러시아 공화국 출신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고, 동부지역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소련이 연방으로서 존재할 때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1991년 연방이 해체되고 나선 문제가 됐다.
훗날 러시아 대통령이 되는 푸틴이 전격적으로 이 지역들을 점령하며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014년 크림반도 점령에 이어 8년 후 이번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 침공을 단행하면서도 말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2022년 3월 러시아의 전격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또 한 번 전 세계의 이목을 끈 우크라이나. 러시아는 '나치 소탕'과 나토의 동진 저지를 명분으로 내걸며 우크라이나 영토로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란 당초의 예상과 달리 러시아는 초기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연합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전을 거듭했다. 영토적, 전략적인 관점에서 러시아에 어떤 득실이 있었는지는 별개로 하고 말이다.
지정학적 관점에서 본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위치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크라이나는 '탁 트인' 전략적 회랑에 위치한 나라가 언제든 전쟁의 참화에 직면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구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친러 성향이거나 최소한 중립지대로 남아주길 희망했다. 반대로 미국과 유럽은 여전히 강력한 러시아의 군사력과 주변국에 가하는 위협을 경계해왔다. 그래서 우크라이나가 확실한 완충지대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포기와 국제적 관심 저하
우크라이나는 소련 연방에서 독립한 뒤 10여 년의 짧은 평화기를 거쳤는데, 이 시기 서방의 관심사는 온통 이 나라 영토에 남아있던 엄청난 핵무기를 과연 어떻게 안전히 이전하느냐에 쏠려 있었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자국 영토 내 핵무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핵보유국이 된다면 기존 핵강대국 중심의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외교적 압박과 돈으로 어느 정도 해결되자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금세 시들어버렸다. 우크라이나는 엄청난 핵무기 시설에 정작 핵무기고는 텅 비어있는 비핵국가로 남게 됐다.
2000년대 친러-친서방 세력 대립과 푸틴의 등장
그러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대 들어서 우크라이나 내에서 친러와 친서방 세력이 대립을 거듭하는데, 우크라이나 내부의 반목과 불신도 이 시기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서 푸틴이 강력한 통치기반을 확립하고 다시금 세력 확장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국가들의 군사동맹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NATO)에서는 러시아의 세력 확장 기도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기껏해야 러시아가 주변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으로 알았지, 훗날 이웃나라의 영토로 밀고 들어가는 '지정학적 현상변경'을 추진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서방의 제재
어떤 큰 현상변경이 있기 전에 늘 그렇듯 징후는 있었다. 국가 차원에서는 국내 여론 분열과 극심한 갈등과 대립이 극에 달하면 외세는 늘 개입의 호기로 판단하는데 우크라이나가 그랬다.
밀레니엄 시대 우크라이나의 파극은 친러파와 반러파가 대립하던 2014년 친러파인 대통령 야누코비치가 반정부 시위로 실각하고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시작됐다. 반러 친서방파는 환호했지만 러시아가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결국 상황은 급반전했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를 전격 합병한 것이다.
서방세계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러시아는 침공이 아닌 러시아계 주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합병이라고 주장했다.
혼란에 빠진 우크라이나 정부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서방세계는 부랴부랴 이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러시아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를 가했지만 러시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8년 뒤 젤렌스키 대통령의 대러 비난과 친서방 정책이 강화되는 와중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전면침공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의 대리전
나토의 동진을 대러 위협으로 규정한 러시아도, 또 러시아와 직접 군사적 대면을 해야 할지도 모를 나토 국가들도 모두 우크라이나를 두고 순순히 물러설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는 서서히 서방과 러시아의 격전장으로 변해갔다. 나토국가들은 병력을 파견하지 않고 엄청난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시간이 갈수록 지원 규모는 천문학적으로 늘어갔다.
전쟁 초기 '특별군사작전'이라는 애매한 용어를 써가며 전면전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던 러시아 역시 우랄산맥 동쪽에서만 충원하던 병력들로는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최전선에 투입됐던 용병그룹 '바그너'의 수장까지 푸틴에게 반기를 들자 그를 제거하고 용병들 역시 주요 전선에서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주요 대도시에서도 병력을 충원해야 했고 전쟁을 실감하는 지역은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러시아 전차부대의 키이우 진격과 참패
지리적으로 서유럽과 러시아의 길목에 위치한 우크라이나는 적대적인 외부세력의 침입 가능성을 항상 고민할 수밖에 없다. 전쟁 초반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동부 국경은 물론 우크라이나 북쪽에서 수도 키이우를 향해 물밀듯이 밀고 내려왔다.
그러던 와중에 수도 키이우로 향하던 러시아 전차부대 행렬이 우크라이나군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한다. 노련한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전차부대 앞뒤로 맹공격을 가한 것이다.좁은 도로에서는 맨 앞의 전차와 맨 뒤의 전차가 파괴되는 상황은 그야말로 재앙이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러시아 전차들은 꼼짝없이 우크라이나 공군과 포병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기자의 우크라이나 취재 경험과 키이우 공대
나는 북핵 폐기의 방법론을 살펴보자는 취지의 기획보도프로그램 <핵폐기 참고서> 제작을 위해 2007년에, 그리고 다큐멘터리 <방사능은 국경이 없다> 제작을 위해 2011년 겨울에도 우크라이나에 머물렀다.
키이우 공과대학을 방문했을 때 우리 제작팀을 환영해준 대학 총장은 "5월에 다시 만나요. 그러면 우크라이나의 빛나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미국 헬리콥터 제작사인 시콜스키사의 태동이 키이우 공대에서 시작됐다는 자부심 어린 얘기는 물론 우크라이나의 밝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함께 말이다.

<방사능은 국경이 없다>를 취재하던 2011년의 모습
시콜스키사 창립자와 키이우 공대의 자부심
시콜스키라는 야심만만한 청년이 키이우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헬기 회사를 만들었다는 자부심에 키이우 공대는 아예 대학 이름 앞에 시콜스키를 넣어버렸다. 키이우 공대 총장은 이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로 흩어진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 동문들도 자랑스럽다며 그 이름들을 열거했다.
동문들이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공업지대에서 많이 활약한다고 했는데, 러시아의 전면 침공을 받은 동부전선 지역이 키이우 동문들이 많이 있는 곳이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 키이우 공대에는 러시아에서 온 유학생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외국에 유학 왔다고 생각하기보다 과거 한 나라였던 곳으로, 마치 지방유학 온 것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 격전을 벌어진 그 전투의 현장에서 과거 키이우 공대의 동문들도 서로 총을 겨누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취재하던 2024년의 모습
우크라이나 역사 속 끝없는 외침과 내전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평화로웠던 시기는 고난의 세월에 비해 상당히 짧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백 년간 외부의 침략과 내전으로 점철된 비극의 역사는 도대체 언제쯤 막을 내릴까.
이 나라의 수도 키이우에는 황금빛 날개가 빛나는 광장 앞 첨탑과 함께 또 하나의 인상적인 상징물이 있는데, 그것은 13세기 침략자인 몽골군이 돌파했다고 하는 거대한 성문이다. 무너진 성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성문만큼은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구돼 우뚝 서 있다.
13세기 몽골 침입과 키이우 공국의 몰락
엄청난 높이의 그 성문을 만든 것도 대단한 일이었겠지만 그 문을 돌파해 쇄도해 들어간 몽골군의 공성술도 놀라울 수밖에 없다. 몽골에 의한 지배, 이른바 2백여 년에 걸친 '타타르의 멍에'는 우크라이나인뿐아니라 러시아인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이다.
몽골의 침략으로 슬라브의 주도권이 파괴된 키이우 공국을 떠났다. 우크라이나를 짓밟은 몽골이 서유럽으로 방향을 튼 덕분에 참화를 간신히 면한 모스크바 공국이 슬라브의 맹주가 됐다.
이후 2백 년 동안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이 세운 킵차크 한국에 맞서지 않고 복종하며 힘을 키웠다. 그리고 마침내 1480년 킵차크 칸국의 잔존 몽골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며 대국 러시아의 기초를 세우고 슬라브의 맹주로 위상을 굳히게 된다. 하지만 몽골의 세력이 완전히 물러간 뒤에도 키이우의 위상은 회복되지 못했고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가 되지 못했다.
17세기에 들어서도 폴란드나 제정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우크라이나인들은 키이우가 정통 슬라브의 정신을 계승한 적자라고 굳게 믿고 있다.
20세기 우크라이나가 겪은 연속된 재앙
하지만 이러한 자긍심과 무관하게 우크라이나는 2차 대전 이전엔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서 스탈린에게, 2차 대전 당시에는 나치 독일로부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시 모스크바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그 상흔이 서서히 잊혀질 무렵인 1986년 북서부 지역 체르노빌에서 원전 폭발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고난으로 점철된 우크라이나 역사에 또 한 페이지를 추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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