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에 새로운 철의 장막이 세워지고 있다. 조지아 영토 20% 점령, 폴란드의 군비 증강, 발트 3국의 방어선 구축까지. 냉전 종식 후 30년 만에 다시 그어지는 경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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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금철영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 탐사보도팀 등을 거친 뒤에는 주로 통일외교안보 분야와 다큐 제작파트에서 보낸 시간이 많습니다. <통일대기획> <국권침탈100년 특별기획> <광복70년 특별기획>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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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 정치부 문화부 탐사보도팀 등을 거친 뒤에는 주로 통일외교안보 분야와 다큐 제작파트에서 보낸 시간이 많습니다. <통일대기획> <국권침탈100년 특별기획> <광복70년 특별기획>에 참여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을 가다" 방사능은 국경이 없다

벨라루스 고멜지역 50만 명 피폭자와 100만 명의 어린이 갑상선암 환자까지.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남긴 상흔과 2100년까지 지속될 방사능 차단 프로젝트의 현주소

체르노빌 희생자 기념관에서 마주한 참상

수도 키이우에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있는데, 입구에 들어서면 그 당시 숨진 수천 명의 군인과 소방관들의 사진이 빽빽이 걸려있다. 인류가 만든 재앙으로 인해 사투를 벌이다 스러져간 이들의 모습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방인력의 원전 투입 당시에 또다른 폭발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것일까.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의 초기 상황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를 잠깐 조망해보면 이렇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어이없는 실수와 안전시스템 미비로 원전 4호기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는데, 인류가 처음으로 접한 원전 폭발 사고이다보니 초기 상황은 우왕좌왕 그 자체였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제대로 지시를 하는 사람도 없고 이렇다 할 대응 매뉴얼도 없었다. 일부 소방 지휘관과 군 장교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화재 현장 진입을 지시했고 소방관들과 군인들은 삽을 들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보호장구 없이 투입된 체르노빌의 소방관

사고 발생 초기에 출동한 소방관과 군인들은 아무런 보호장구 없이 마스크를 쓰거나 방독면만 착용한 채 현장에 투입된 것이다. 소련의 유능한 과학자들이야 방사능이 이렇게 대규모로 누출될 경우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마했던 그 재난의 가능성을 고민하고 치밀하게 대비한 사람이 없었던 탓에 더 큰 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투입된 소방관과 군인들은 다시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곧장 걸어들어갔던 것이다. 심리적으로는 방독면 착용자들이 조금 더 안정감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치명적인 고준위 방사능 앞에서는 모든 게 무용지물일 뿐이었고 그 결과는 초기 지상 작업 투입인력 전원의 사망이었다.

소련 정부의 늦은 정보 공개

더 심각했던 문제는 소련 정부가 이 중차대한 상황에서 정보를 즉각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각 개인들이 알아서 피신하거나 대응할 수 있게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소련정부는 사고가 난 뒤 한참이 지나고 나서 서방언론에서 보도가 난 뒤에야 원전사고 사실을 알렸다. 그 기간 동안 그저 화재가 났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들은 영문도 제대로 모른 채 계속 스러져갔다.

방사능 피폭량을 줄일 수 있었던 방법들

고준위 방사능이 갑자기 유출될 경우, 지하로 몸을 숨기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폭량을 최대 1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최소한 집 밖에 나오지 않고 낮은 자세로 벽 뒤에 몸을 숨기고만 있어도 방사능 피폭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체르노빌 원전이 있던 프리피야트시의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사고 당일에도 야외에서 놀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여성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행사까지 이어졌다. 체르노빌 희생자 기념관에는 소방관들과 군인들의 사진뿐 아니라 수많은 어린이들의 사진도 걸려 있다.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고 또 일어나지 말아야 했음에도 벌어진 참사의 결과다.

체르노빌 소방관 생존자의 증언

나는 체르노빌 사태 당시의 투입된 소방관들 가운데 생존자들을 찾아서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예외없이 지하에서 작업을 한 사람들이었다. 고스란히 방사능에 노출됐던 지상 작업자들과 달리 어느 정도 자연적인 차단막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하 작업자로 분류됐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고는 해도 사고 이후 수십 년간 고통스런 생활을 해야 했다. 하루 20알 가까운 약을 복용해야 하는 '국가관리 피폭자'로서의 힘겨운 날들을 보내게 된 것이다.

모스크바 6호 병동의 기록

살아남은 자들은 그날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고 했다. 사망한 동료들에 관한 얘기는 더 참혹했는데, 모스크바 6호 병동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대부분 지상작업자들이었고 이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별 이상 징후가 없어 보였다고 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별거 아니군'이라고 말하며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들의 상황은 이송 뒤 사흘째 되던 날부터 급격히 달라졌다. 음식물을 모두 토하기 시작하고 온몸에 수포가 생겨나거나 호흡 곤란을 호소하더니 대략 1주일째 되는 시점부터 숨을 거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2022년 러시아의 체르노빌 점령

체르노빌의 지금 상황은 어떨까. 2022년 3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이 체르노빌 원전을 한때 장악했었는데, 러시아가 굳이 체르노빌을 장악하려 했던 이유는 아직 불분명하다. 러시아 병사들이 방사능에 대해 어느 정도 교육을 받고 진입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아마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피폭자가 다수 나왔을 수도 있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사고 원전 4호기에서는 방사능이 새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체르노빌 안전요원들조차 따라오지 않았던 체르노빌의 방사능 오염지역 '붉은 숲'에서 취재하다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체르노빌 원전 지대의 방사능 분포

체르노빌 원전 지대는 사고원전인 4호기 바로 옆을 제외하곤 방사능 측정기로 정상수치가 나오는 곳이 허다하다. 하지만 방사능이 새어 나와 이동하는 바람 길은 따로 있어 보였다. 원전 4호기를 멀리 벗어나도 특정지역의 방사능 수치는 정상수치의 몇십 배를 초과하는 곳도 있었다. '붉은 숲' 지역이 대표적이었다.

벨라루스가 입은 더 큰 피해

1986년 당시 체르노빌이 있던 프리피야트시를 중심으로 발생한 피폭자 수는 대략 5만여 명. 그런데 북쪽으로 직선거리 150킬로미터 정도인 지금의 벨라루스 고멜지역에서 피폭자가 무려 10배에 달하는 50만 명이 발생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당시 바람이 북쪽으로 불어 방사능 낙진이 고멜지역을 덮친 것이다.

순식간에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참사로 직격탄을 맞은 벨라루스 정부는 전시에나 바삐 움직일 법한 비상사태부를 총동원해 대응에 나섰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벨라루스에선 비상사태부가 고멜 등 피폭지역에 대한 관리 등을 총괄 지휘하고 있다.

'하얀 러시아' 벨라루스의 상흔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의 밤 거리를 걷다 보면 큰 광장의 한가운데서 작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벨라루스의 '벨라'는 '희다'라는 뜻이고 '루스'는 슬라브족과 러시아를 뜻한다. 즉 눈처럼 흰 '하얀 러시아'란 뜻이다. 그런데 이 눈처럼 희고 아름다운 벨라루스에 '어두운' 상흔들이 많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벨라루스의 대규모 토양 교체 작업

인터뷰를 했던 벨라루스 정부 관계자는 고멜 시내 주거 밀집지역의 흙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전부 갈아엎었다고 말했다. 최소한 30센티미터 정도의 흙을 들어내고 멀리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흙으로 덮었다고 했다. 방사능 유출과 세슘에 의한 토양오염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지금도 대규모 객토 작업이 진행 중인 곳이 있으니 원전사고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사능 치료받는 어린이들과 '소금 방'의 현실

더 큰 문제는 사고 이후 태어나는 아이들도 줄줄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멜지역에는 지금도 방사능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된 많은 어린이들이 이른바 '소금 방'에서 주기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 소금방에서 나오는 요오드화 칼륨(KI) 성분 덕분에 방사능이 갑상선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치료의 일환으로 '소금 방'을 대대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벨라루스 보건당국의 관계자의 설명이다. 취재과정에서 '소금 방'에 있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많은 어린이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이 시설이 과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를 데이터로 확인하진 못했으나 심리적인 안정효과는 있어 보였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어린이 갑상선암 환자 100만 명 증가

그런데 체르노빌의 비극이 고멜로만 번진 것은 아니다. 이 '방사능의 바람길'을 따라 유럽 각지에서 소아 갑상선 암환자가 원전사고 이후 10여 년간 급증했다. 그 수가 백만 명에 달했다는 것이 유엔의 분석이다. 그런데 유럽의 원자력 학계가 이 같은 분석에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소아 암환자 급증이 방사능에 의한 것이라면 그 증거가 뭐냐는 게 문제제기의 요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유엔 차원의 방대한 조사를 수년간 벌인 결과 이렇게 결론을 냈다고 한다.

"유럽 각지에서 소아 갑상선 암환자가 급증한 것과 관련해, 체르노빌 원전사고 이외의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그 어떤 근거도 찾지 못했다."

후쿠시마에서도 반복되는 논란

상식적으로 본다면 우스꽝스러운 이런 상황이 참혹한 원전사고를 겪고도 계속되는 것을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겪은 뒤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후쿠시마의 농산물과 원전 앞 바다가 방사능에 오염됐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별로 놀라지 않게 된다. 매일 '오염수'가 바다로 대량 방출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체르노빌 '붉은 숲'에서 목격한 자연의 변화

나는 체르노빌 원전사태로 폐허로 변한 프리피야트시를 돌아보면서 붉게 물든 나무 숲을 자주 목격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마치 잔뜩 녹이 슬어버린 못처럼 나무의 몸통과 가지의 색이 변해버린 것을 알게 된다. 살며시 나무를 쓰다듬듯 만져보면 검게 그을린 건물의 잔해 속에서 재가 떨어지듯 나무의 외피들이 힘없이 땅 위로 흩뿌려진다.

체르노빌 원전 인근의 연구소가 원전사태 이후의 생태변화를 연구하고 있는데, 내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연구소 부원장으로부터 들었던 말은 지금도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나무와 가지들의 색깔이 붉게 변한 이유와 관련해, 원전사고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지역의 토양과 생태계가 원전사고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300년은 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럽연합의 체르노빌 복구 노력

의학계와 원자력학계의 논쟁과는 별개로, 사고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체르노빌의 상흔을 치유하려는 유럽연합 차원의 노력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 린츠를 거쳐 독일과 프랑스는 물론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까지 어린이 갑상선 암환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럴진데 어떻게 원인논쟁이나 하면서 손 놓고 있겠는가.

2조원이 투입된 체르노빌 대형 돔 프로젝트

내가 체르노빌 원전을 현장 취재할 당시에는 원전 4호기를 완전히 덮어버릴 대형 돔이 건설 중이었는데 지금은 완성돼 가동 중이다. 건설 당시에는 사고 원전 위에 직접 설치하는 작업이 위험해서 레일을 만들고 원전 바로 옆에서 대형 돔 형태의 구조물을 건설했다. 그리고 구조물이 완공돼 레일을 따라 이동한 뒤 원전 4호기를 대형 돔 안에 완전히 가둬놓은 상태다. 높이만 100미터가 넘는 초대형 구조물로 유럽연합을 위시해 50여 개국이 15억 유로(한화 2조원 정도)를 투입해 건설했다.

2011년 건설 책임자와 국제지원센터 관계자들을 인터뷰할 당시에는 돔 건설에 9억 9천만 유로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간 셈이다. 그럼에도 이 대형 구조물이 방사능 노출을 차단할 수 있는 내구 연한은 2100년까지다. 그 이후에는 또 다른 어떤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얘기다.

자 여기까지가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가져온 후유증에 대한 얘기다. 그런데 구 소련 시절의 우크라이나는 원자력 발전소에 벌어진 참사 외에도 엄청난 핵무기의 관리 문제로 내심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구 소련시절 한때 4천여 기가 넘는 어마어마한 핵무기들이 우크라이나 땅에 있었는데, 이 가공할 무기의 대부분은 나토 국가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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